아름다운 블로섬
우연히 만난 모명재 본문
큰딸을 출장온 회사까지 태워주고 돌아서는 입구에
모명재라는 문화재 표지판이 보였다.
모명재가 무엇일까?
이정표 따라 좁은 길로 들어서 모명재 주차장 앞에 닿았는데
주차장은 만차되어 차를 세울 수 없었다.
뉴턴하여 돌아설까 하다가
주차장 옆 자투리 공간에 어렵사리 비집고 들어가
임시 주차를 성공했다.
누군가 내 주차가 방해된다면
전화를 주십사 하고 전번이 보이도록 놓아두고
모명재로 향했다.
모명재에는 나 외 아무도 없었다.
그럼 만차된 주차 차량들은 뭘까??
귀웃귀웃하는 나를
모명재 안내하시는 분이 안내소에서 나와 반겨준다.
그리고 모명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내가 알아듣고 이해하기 좋게 설명을 해 주셨다.
돌아와 백과사전을 펴 놓고 읽어보니
설명사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과 같아 조금 복사하여 옮겨 본다.
모명재(慕明齋)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복야공(僕射公)
두사충(杜師忠)의 후손들이 그의 덕과 뜻을 기리기 위해 1912년에 건립한 재실이다.
두사충을 포함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5인의 선조를 기리고 있다.
두사충의 호는 모명(慕明)으로 중국 두릉(杜陵)이 고향이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군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참모로 조선에 왔다.
그의 직무는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를 구축하기에 적합한 터를 잡아주는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였다. (다음백과에서 퍼옴)
귀화한 두사충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다.
두사충은 경상감영을 대구로 옮기기를 주장했던 체찰사 이덕형과 가까웠는데
나중에 자신이 하사 받은 땅이 감영을 설치하는 데 있어 최적지임을 알고
그곳을 국가에 헌납하고 주거지를 계산동 일대로 옮겼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가 두 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명나라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최정산(最頂山, 현재의 대덕산) 밑으로 거주지를 옮긴 그는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칭했다.
대명단(大明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명나라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
그의 사후에 자손들은 유언에 따라 형제봉 기슭에 묘소를 쓰게 되었다.
두사충은 조선에 귀화한 뒤에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명당을 잡아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다음백과에서 퍼옴)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에게 써준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한시가
모명재 건물 전면 다섯 개의 기둥에 적혀 있다.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같이하고
北去同甘苦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했네
東來共死生
성 남쪽 타향의 달빛 아래에서
城南他夜月
오늘 한 잔 술로 정을 나누네
今日一盃情 (다음백과에서 퍼옴)
후손들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마당에 ‘두사충 신도비’를 세웠다.(다음백과에서 퍼옴)
풍수전략가인 그는 1592년 임진년에는 수륙지획주사로,
또 1597년 정유년에는 비장(裨將)이라는 각기 다른 직함을 가지고 전란에 참여했다.
그는 주로 병영 터를 고르고 군진을 전개할 때 조언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명나라군이 조선군과 합동작전을 할 때에도 조선 측과 전략 · 전술상 긴밀한 협의를 했다.
두사충은 정유재란 때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과 함께
비장복야 문하주부(裨將僕射門下主簿)로 활약하며 공을 세웠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원병으로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귀국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점차 쇠퇴하는 것을 보고 조선에 귀화할 것을 결심한 그는
대구에 정착하여 두릉 두 씨의 시조가 되었다.(다음백과에서 퍼옴)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객사(慶山客舍)가 철거될 때
그 재목을 사다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건물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이 퇴락하자 1966년 2월에 중수했다.
모명재(慕明齋)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모명재는 네모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다음백과에서 퍼옴)
비문은 충무공 이순신의 7대손인 삼도 수군통제사 이인수(李仁秀)가 지은 것인데,
왜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교류가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비석이다.
신도비 왼쪽에 서 있는 작은 석인상이 인상적이다.(다음백과에서 퍼옴)
백과사전에 실린 내용이 내가 그곳에서 듣고 온 설명과 한치의 어긋남이 없어
답사와 복습이 저절로 되는 듯하다.
내가 모명재를 꼼꼼히 살펴보며 여러 사진을 찍었는데
그 순간 나처럼 모명재를 찾아온 손님이 또 있었다.
이 노루도 나처럼 설명사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을까 ㅎㅎㅎ
모명재 뒤쪽으로 두사충의 묘지가 보였다.
몇 번 올라가 볼까 하다가
노루가 다니는 것을 보았기에 혼자는 위험할 것 같아
다음에.. 하고 기약 없는 기회를 남겼다.
사진 담아 온 날 23.08.24일 오후 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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